글 경북대학교 사학과 문학박사(한국사, 고려태조 왕건 전공) 김명진

태조 왕건 즉위 후 발생한 반란
고려 태조 왕건(高麗 太祖 王建)이 건국한 918년에 반란(모반)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였는데, 천안의 목주(木州, 대목군, 대목악군, 목천읍) 일대도 이와 연관되었다.
왕건은 원래 태봉 국왕 궁예의 부하 장수였다.
궁예는 영토가 넓어지며 강성해지자 교만해지면서 초심을 잃었다.
이와 짝하여 궁예는 민심마저 잃고 말았다.
이에 부하들의 추대를 받으며 왕건은 거사를 하였다.
918년 6월에 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새 나라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왕건은 옛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며 즉위하였다.
하지만 모든 신하, 모든 민(民)이 왕건의 즉위에 만세를 불렀던 것은 아니었다.
왕건이 즉위한 918년에 반란이 연속되었다.
왕건은 이를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반란이 이어지고
태조 왕건이 즉위한 918년 첫해 4개월 동안에 무려 6차례나 반란(모반)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반란은 여러 사정이 있었겠지만 나름 궁예를 여전히 지지하는 세력들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왕건이 수행한 통일전쟁의 전장(戰場)은 크게 4군데였다.
그 전장은 북방지역, 경상지역, 충청지역, 나주서남해지역이었다.
이 중에서 충청지역이 왕건의 즉위 첫해의 연속된 반란에 직간접으로 연관되었다.
해당 사건들을 시간 순서대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이상의 반란들은 충청지역과 직간접으로 연관되었다는 특징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현 천안 일대의 일정한 영역의 민(民)이 동조하였다.
당시 목주(木州) 지역 사람들이 수차례 반란을 일으켰었다.
목주는 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과 그 주변 일대에 해당되는 곳이었다.
지리적으로 천안시 관내 중에서 태조산의 동쪽 일대였다.
목주민의 반란은 이 지역이 단독으로 일으킨 것이 아니라 위에 열거한 반란과 수차례 연관되었던 것이다.
왕건은 이에 대해 목주민에게 징벌을 가하였는데 그 성씨(姓氏)를 동물의 다섯 성으로 내려 주었다.
그 다섯 성씨는 소[우(牛)], 말[마(馬)], 코끼리[상(象)], 돼지[돈(豚)], 노루[장(獐)]였다.

반란을 멈추고 충성하는 지역으로

▲ 다음지도 인용_천안부와 목주 위치(선은 천안 태조산에서 흑성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목주민은 왕건에게 징벌을 받았으나 곧 복권되었다.
따라서 징벌을 받은 목주민의 동물 성씨 한자(漢字)가 바뀌었다.
우(牛)는 우(于)로 고치고, 상(象)은 상(尙)으로 고치고, 돈(豚)은 돈(頓)으로 고치고, 장(獐)은 장(張)으로 고쳤다.
마(馬)는 이전에도 익히 알려졌던 성씨이기에 그대로 마(馬)라고 하였다.
이는 목주 지역이 처음에는 왕건에게 반발했지만 바로 복종하고 충성을 했기에 그 징벌이 풀려서 성씨 한자도 바뀌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왕건은 즉위 초에 발생한 반란을 빨리 진압해야만 하였다.
이를 빨리 수습하지 않으면 국정 운영을 제대로 시작해 보기도 전에 나라가 무너지기 때문에 시급한 문제였다.
다행히 왕건은 즉위 첫해에 발생한 반란을 초기에 모두 수습하였다.
물론 현 천안시 관내 지역도 이후에는 왕건에게 적극 협조하는 지역이 되었다.
그래서 목주 지역 사람들의 성씨가 동물 이름에서 좋은 의미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즉, 천안 목천 일대 지역민의 왕건에 대한 반발은 일시적이었다고 판단된다.
시간이 흘러 930년(태조 13) 8월에 왕건은 태조산에 올라 그 서쪽에 천안부[天安府, 천안도독부(天安都督府)]를 설치하게 하였다.
새로운 충청지역의 군사적 거점으로 선택된 곳이 태조산의 서쪽 천안부였다.
태조산의 동쪽이 목주이고, 천안부는 그 서쪽이었다. 천안부를 설치한 여러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고려 건국 초에 벌어진 목주민의 반란 영향이었다.
왕건은 반란으로부터 안전한 태조산의 서쪽을 충청지역의 새로운 군사적 거점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태조산의 서쪽이 천안의 중심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 경북대학교 사학과 문학박사
(한국사, 고려태조 왕건 전공)
김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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