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경북대학교 사학과 문학박사 김명진
천안에 남겨진 왕건 관련 지명

고려 태조 왕건(高麗 太祖 王建)은 한국사에서 최초의 실질적 통일을 완성하였는데, 우리 천안(天安)이 큰 역할을 하였다.
이른바 신라의 통일이라는 것은 북쪽에 발해가 있었기 때문에 완성도에 문제점이 있었다.
918년 6월에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18년의 노력 끝에 분열된 여러 세력 및 국가를 하나로 만들어 통일을 완성하였다.
그때가 936년 9월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 속에서 930년 음력 8월 8일에 왕건이 세운 군사적 신도시인 천안부[天安府, 천안도독부(天安都督府), 충남 천안)]가 통일전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때 탄생된 천안부는 충청지역의 군사적 거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왕건은 후백제 견훤을 상대로 한 통일전쟁의 중부전선에서 우위를 차지하였다.
결국 통일전쟁의 최종 승자는 왕건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큰 배경으로 인하여 천안에는 곳곳에 왕건의 흔적이 지명으로 남아 있다.
왕자산(王字山), 태조산(太祖山), 오룡동(五龍洞)

▲ 태조산 정상에서 바라 본 왕자(王字)

▲ 오룡동성당(상)과 오룡동우체국(하)
930년 음력 8월 8일에 왕건은 목천을 거쳐 천안의 어떤 산을 오른다.
이후 이 산은 천안에서는 물론이고 한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 산에 오른 왕건은 사방을 살펴보았다.
특히 오늘날 천안의 주요 시가지인 서쪽의 편안한 지형이 주목되었다.
왕건은 먼저 자신이 오른산에 성(城)을 만들게 했는데 그 이름을 왕자성(王字城)이라고 지어 주었다.
그 산의 모양새가 임금 왕자(王字)처럼 생겼다 하여 그리한 것이다.
따라서 그 산의 이름 또한 왕자산(王字山)이 되었다.
이는 임금의 산이라는 것이니 고려 임금인 왕건 자신의 산이라는 것이다.
한 나라를 개국한 첫 임금을 태조라 부른다.
왕자산은 태조 왕건 사후(死後)에 태조산(太祖山, 421m)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천안의 으뜸 산[진산(鎭山)]인 태조산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만들어졌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왕건은 태조산의 서쪽을 오룡쟁주(五龍爭珠)지형이라 극찬하였다.
먼저 오룡(五龍)이라 함은 다섯 마리의 용을 뜻하는 것이다.
이어서 쟁주(爭珠)라 함은 여의주(구슬)를 차지하려 다툰다는 것이다.
왕건은 태조산의 서쪽을 다섯 마리의 용들이 여의주를 차지하려 다투는 형상인 천하 명당이라고 크게 칭찬하였다.
그래서 생긴 마을 이름이 오룡동(五龍洞)이었다.
오룡동우체국과 오룡동성당 등을 통해서 오룡쟁주 명당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천안 시민들은 중요한 사안을 놓치면 안 된다.
우리나라 산들은 웬만하면 산에 임금 왕자를 그릴 수 있다.
산의 기본 등을 밑으로 긋고 그 옆 줄기 세개를 선택해서 획으로 삼으면 임금 왕자가 된다.
이는 아마도 산의 생김새가 왕자여서 왕자성·왕자산이 되었다기보다는 ‘왕자성·왕자산이어야 한다’가 아닐까 한다.
왕건은 임금의 성·임금의 산·자신의 성(산)으로 명명하여 자신의 행위를 신성화·정당화 하였다.
오룡쟁주 형세가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 논리이다.
풍수지리설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명당은 대체로 햇볕이 좋은 남쪽 또는 동쪽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왕건은 태조산의 서쪽을 오룡쟁주의 명당이라 하였다.
이는 ‘명당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왕건의 목적은 신생 천안부 민(民)의 자부심부여와 충성심 유도였던 것이다.
마침내 왕건은 천안부민의 도움 속에서 충청지역을 고려의 영역으로 만들었다.
나아가 왕건은 최종 통일 완성이라는 대업을 이루는데에도 성공하였으니 한국사에서 천안의 중요성을 읽을 수 있다.
이외에도 천안에서 왕건과 관련된 지명이 곳곳에 남아 있다.
왕건의 흔적이 배어 있는 지명들을 열거하면 유량동, 시름세, 성거산(聖居山), 마점사, 유려왕사, 고정 등등이다.
이를 다 밝히지 못하는 지면의 부족이 안타깝다.
좋은 날, 시민들에게 강의를 통해서 이러한 역사적 큰 흔적이 모두 알려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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